태권도가 성립되기 이전 우리나라에는 공수도, 당수도, 권법, 수박도 등 다양한 이름의 무술들이 존재했다. 황기의 무덕관, 노병직의 송도관, 최홍희의 오도관, 이용우의 정도관, 전상섭이 만든 지도관, YMCA권법부의 윤병인 선생이 만든 강덕원, YMCA권법부 출신 이남석이 만든 창무관, 가라테를 배운 이원국이 세운 청도관, 조선연무관 출신 이교윤이 설립한 한무관, 이렇게 9개의 관을 태권도의 모체가 된 9대관이라고 하며, 태권도의 기간도장이라고도 부른다
이 기간도장은 국기원으로 통합되었다. 국기원(國技院, World Taekwondo Headquarters)은 1972년 설립된 중앙도장으로서 세계태권도의 본부이고 세계태권도연맹(WT)의 모체이다. 품단증과 각종 자격증을 발행하고 태권도 인구 저변확대를 위하여 요구되는 연구, 교육 그리고 행사를 주관하는 국제기관이다.
이 시기, 국기원으로 통합에 반대한 관과 사람들이 있었다. 이유는 여러가지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은 것은 첫 번째였을 것이다. 하지만 국기원으로 흡수되지 않으면 태권도가 아닌 것이 되며 장기적으로는 단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당시에도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 글은 그 통합에 반대한 삐딱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때는 1960년대 초반, 태권도가 아직 다양한 관으로 존재했을 때이다. 이 시기는 생물학적인 폭발기라고 하는 캄브리아 대폭발기에 비견할 만하다. 혼란스럽지만 창조적인 시대였으며 해외로 망명하기 전인 최홍희 총재도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국기원이라는 중앙단체가 없었던 만큼 단체와 사람들의 활동의 자유도 높았을 것은 당연하다. 새로운 기술과 시스템이 있으면 지금은 불가능한 자신만의 ‘관’을 만들고 인정받을 수도 있었다. 이 시기 수 많은 관 중의 하나가 태권도 문무관이었다. 문무관이라는 이름은 무인은 문무를 겸비해야 한다는 뜻으로 최홍희 총재가 명명하였다고 한다.
1962.5.16.
수원시공군 제10전투비행단의 태권도 사범진이 모여 그동안 절감해 온 태권도의 한계성을 초월하여 더욱 고차원적인 기술의 개발을 위한 연구진을 구성하였다.
1967.10.1.
기술연구를 계속해 오던 연구진과 사회 태권도 사범들이 서로 규합하여 새로 운 태권도기술의 창조와 보급을 도모하고자 국제태권도연맹문무관을 창립하다. 국제태권도연맹(ITF) 산하 구성관인 문무관(文武館)을 창설하였다. (창설자 신윤헌)
1969.4.10.
태권도문무관의 실력이 인정되어 공군과 해군의 요청으로 교관 요원의 위탁 교육을 시행했다.
1969.12.20.
경남 합천군 봉산면 봉계리 289번지에서 태권도 사범들(문무관)로 구성된 연구진 15 명이 경남 합천(해인사에서) 1개월간에 걸쳐 그간의 연구결과에 대한 위력의 검토, 가능성에 대한 평가(評價)와 실기화 작업 실습 훈련을 시행하였다.
1977.10.10.
유봉순 국회의원 별장과 합천 해인사에서의 합숙훈련 이후 8년간의 계 속된 연구의 진행으로 이론 및 실기의 과학적 체계를 완성하였으나, 태권 도는 스포츠화되어 무예적인 특성보다는 경기적인 경향이 높아짐으로 써 경기규정에 의하여 기법의 역량 발휘에 장애 요소가 너무도 많으므로 새 고차원의 순 한국무술인 문무도(文武道)를 발족하였다.
1978.10.10.
충분히 연구된 이론의 토대 위에 수학의 원리를 도입하여 시간과 공방 동작의 횟수와의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이론을 실기화한 기본 수련 교안을 확정하였다.
북한의 위협을 막기 위해 탄생한 한국형 태권도 손기술
태권도인들의 연구에 의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이것은 기존의 태권도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태권도인으로서 자부심이 높았던 이들은 이것을 태권도 시스템의 발전이라고 보았다. 국기원으로 흡수당하지 않고, 국기원 경기룰과 시스템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이들은 사파라고 부를 이유가 있을까? 무협소설에서 사파(邪派)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정파인들이 지키는 룰과 시스템을 지키지 않고 자유롭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저마다 뻗은 가지는 다르지만 그 뿌리는 태권도 ‘관’ 시대에서 유래했으며 이들을 무술사적인 시각으로 분류해도 범 태권도 群에 속해있는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북한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한 애국자들아닌가?
이 문무도, 문무타격도의 핵심은 ‘음양수’였다. 동양철학의 상수학의 이론을 빌어 시스템을 체계화하였으며 이 음양수의 원리가 총검술, 단검, 단봉, 장봉, 경호무술 등에도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랬다. 출발 자체가 북한 격술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니 군대에 보급할 수 있도록 체계화해나간 것이다.
이 문무도를 만든 그룹에 참여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신윤헌, 이선결, 이창민, 박내영, 박영수, 김창영, 이상학, 김영수 외 6명
한 때 이름을 날렸던 프로태권도도 이 그룹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회단체 한국프로태권도협회는 1979년 10월경 대한체육회로부터 승인을 받아 1980 년 2월경 창립하여 윤재영 회장을 필두로 고채천 이사, 임두헌 이사 외 3명과 권호열 사무처장 체재로 조직하고 500여 명의 태권도인이 모여 발족하였다.
국내 랭킹전과 심판교육 경기교육 지도자교육을 통해서 3년여간 운영해오다 제1대 권호열 사무처장이 미국에 이민 가게 되어 그동안 태권도 체육관장으로서 선수와 지 도자로 심판으로 활동해오던 황봉규 관장이 1983년 4월 1일부로 제2대 사무처장에 임명되었다.
1985년 사무실을 서초동으로 옮겨 더욱 프로태권도 활성화를 위하여 매진하던 중 초대 윤재명 회장이 사의를 표명하여 제2대 회장으로 예술인아파트조합 이사장이었던 이일성 회장을 추대하여 대치동 총회회관 건물 1층에 전용 체육관을 만들고 2층에 협회 사무실을 사용하는 등 본격적인 태권도프로화 시대로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김학준, 김민수 같은 한국 챔피언을 배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9년에 이일성 회장이 사임해서 협회가 어려워졌다. 이 협회를 이어받아 신호균, 박영수, 이상학, 원민식이 사단법인 대한프로태권도 연맹을 창설하고 1991년 1월에 체육청소년부장관 허가 제39호로 발족하게 된 것이다.
문무빈태권도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