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는 가라테를 일본에게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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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는 가라테를 일본에게 빼았겼다.

가라테의 역사

가라테는 류큐 왕국 시대에 시작한 무술이지만, 가라테에 대해 쓰인 당시의 문헌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현재 전해진 가라테의 역사는, 주로 메이지 시대의 가라테 원로들이 전한 이야기에 근거하고 있다.가라테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주된 것은 다음과 같다.

구메36성 수입설

오키나와 나하의 구메촌(현 나하시 구메)에 1392년 당시 명나라의 복건성에서 “민閩36성姓”이라는 직능 집단이 이주해 왔다. 그들은 류큐에 선진적인 학예, 기술 등을 가져왔지만, 이때 가라테의 기원이 되는 중국 권법도 동시에 가져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중국도 권법이 미발달한 시대라 현재는 이 설에 의문을 제기하곤 한다. 같은 중국 전래설로, 오키나와에 무기 소기를 금지한 금무정책 후에 ‘요시나가수입설(慶長輸入説)’과 『대도필기大島筆記』의 기술을 바탕으로 공상군(* 공상군公相君은 1762년에 저술된 『대도필기大島筆記』에 나온 인물로 18세기 후반 오키나와를 방문한 중국무술가이다)이 전했다는 ‘대도필기설’등이 있다.

메카타舞方에서 발전설

메카타는 류큐 무용의 일종이다. 오키나와 지방에는 메카타라는 노래에 춤추는 무술적인 무용이 있어, 1945년 전까지 각 지에서 볼 수 있었다. 또 무용 행렬 중 앞에 서 있는 메카타나는 사람이 노래에 맞추어 가라테 같은 무술적인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술적 요소를 가진 춤에서 테手가 태어나 가라테로 발전하였으며 춤 속에 가라테로 발달 이전의 원초적 무술의 모습이 남아 있다는 설이다. 아사토 안코(安里安恒)와 그의 제자 후나코시 키친이 이 설을 주장하였다. 이 설처럼 한국의 전통무술 춤 속에 숨겨서 전해졌다는 설이 있다. 한 지역의 몸짓은 유사하여 춤과 무술의 유사한 동작이 있을 수 있지만, 목적이 다르므로 무술과 춤은 섞여서 전해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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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씨름은 한국 씨름과 똑같다. 오키나와의 씨름과 무용은 한국 것과 무척 유사하여 고대부터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오키나와의 전통무술 테手에 중국무술이 가미되어 가라테로 발전했다는 설이 현재 주류이다. 이외에도 오키나와 씨름인 시마(沖縄角力 오키나와의 씨름인 시마는 한국씨름과 똑같다.)에서 발전했다는 설, 일본 본토에서 전래하던 유술이 기원이라는 설 등이 있다. 어느 설도 근대 이후의 연구자가 주장하는 설이지, 각 설을 뒷받침하는 명확한 역사자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키나와 씨름은 한국 씨름과 똑같다. 오키나와의 씨름과 무용은 한국 것과 무척 유사하여 고대부터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반대로 오키나와에서 한국으로 수입된 것에는 줄다리기가 있다. 오키나와 나하시의 민속놀이인 줄다리기와 한국 기지시의 줄다리기는 매우 유사하다. 

류큐 왕국 시대 – 도데사쿠가와 이전과 이후

류큐국(오키나와어: 琉球國 루츄쿠쿠)은 동중국해의 남동쪽, 현재 일본 오키나와현 일대에 위치하였던 독립 왕국이다. 100여 년간 삼국으로 분할되어 있던 것을 1429년에 중산국(中山國)이 통일하여 건국하였다. 류큐국은 한국과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등과의 중계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1609년에 사쓰마 번의 침공을 받은 이후, 여러 차례 일본 제국의 침략을 받아 1879년에 강제로 병합(류큐 처분)되어 멸망하였고, 오늘날 오키나와현으로 바뀌었다.

류큐의 역사에서, 가라테라는 단어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도데 사쿠가와唐手佐久川라고 개명된 사쿠가와 칸가佐久川寛賀부터이다. 사쿠사와는 20대(19세기 초)에 당시 청나라에 유학하여 중국 무술을 배웠으며 사쿠가와가 류큐에 도입한 중국 무술에 오키나와 고유의 무술인 테手(티)가 합해져 가라테의 원류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사쿠가와 이후, 테手는 가라테에 흡수·동화되면서, 서서히 쇠퇴해간다. 보통 가라테의 역사를 말할 때, 이 가라테와 테手의 구별이 애매하다. 협의의 가라테의 역사는 사쿠가와로부터 시작된다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쿠가와는 어디까지나 당수=중국 무술의 수련자로, 「일본의 무술인 빌 공空자 공수도空手道의 기원은 사쿠가와의 제자인 마츠무라 소콘松村宗棍 이후이다. 테手까지 포함한 전반적인 오키나와 무술 의미로서 가라테 역사는 물론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테手의 시대

16세기, 교아하곤짓키가 가라테空手라는 무술을 사용하여 암살자를 물리쳤다는 기술이 정사 『 구양球陽』(1745년 경)에 있다. 이것이 가라테 이전의 맨손 격투가 있었다는 증거이지만 현재 가라테의 원류일까는 증명이 어렵다.

또 17세기 여러 무술가 이름이 알려졌으나 그들이 어떠한 격투기를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테手를 사용하는 무인들의 이름은 18세기에 들어 많아진다. 세이헤이오야가타西平親方, 구지카와우동具志川親方, 도카시키웨카다쯔우칸渡嘉敷親雲上, 사이세이쇼(蔡世昌), 마가베쵸켄(真壁朝顕) 등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일본 본토 도사 지역의 유학자 도베 요시히로가 도사에 표류한 류쿠의 귀족을 조사한 『대도필기大島筆記』(1776년) 속에 오키나와에 온 공상군이 조합술組合術이라는 이름의 무술을 선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공상군은 1756년에 방문한 사절 중의 한 명으로 추측하며 가라테의 기원을 공상군의 방문으로 보는 설도 있다.

 

당수의 시대 (당수唐手와 공수空手는 한자가 다르지만 일본어 발음이 같기 때문에 혼동을 방지하고자 한국어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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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테의 창시자, 마츠무라 소콘

19세기가 되자, 당수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그러나 당수와 테의 차이는 분명치 않다. 메이지 시대 초 때까지, 가라테 이전의 테는 오키나와테로 불리며 가라테과는 구별되었다. 하지만 양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는 불명확하다. 19세기 이후의 가라테 수련자로는 슈리 지역에서는 사쿠가와칸가佐久川寛賀와 그의 제자 마츠무라소콘松村宗棍, 모리시마우에카타盛島親方, 아부라야야마시로油屋山城, 도마리 지역에서는 우쿠류우宇久嘉隆, 데루야키신照屋規箴, 나하 지역에서는 고구스쿠이세이湖城以正, 치쿠돈베친長浜筑登之親雲上 등이 있었다. 이 중 마츠무라소콘松村宗棍는 류큐왕국 시절의 가장 위대한 당수가의 하나로 꼽는다. 류큐 국왕의 시종 무관의 직에 있으며, 국왕의 무술 지도도 맡았다고 한다.

가라테에 유파가 등장하는 것은, 가라테가 일본 본토에 전해진 근대 이후이다. 그 이전에는 가라테가 번성했던 지역명을 따서 슈리테, 나하테, 도마리테의 세 개로, 대략적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수리테 수련자 중에 도마리테나 나하테를 동시에 배운 예도 있어 이 분류는 엄밀하지 않다.

당수의 공개(메이지 시대)

류큐 귀족간 몰래 전해지던 가라테가 1879년, 류큐가 일본과 병합되고 류큐 왕국이 멸망하자 가라테도 실전의 위기를 맞았다. 류큐의 귀족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순식간에 몰락하여 가라테를 수련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일부 귀족은 청나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개화당(혁신파)과 완고당(보수파)이 극한 대립하면서 귀족 계층은 동요했다.

이 위기에서 당수를 구한 것이 이토스 안코糸洲安恒다. 이토스의 노력으로 가라테는 1901년에 슈리 심상 소학교에서, 1905년에는 오키나와현 중학교 및 오키나와현 사범학교 체육과에 채용되었다. 그때 당수를 읽는 법도 투디에서 가라테로 바꾸었다. 가라테는 이토스에 의해 일반에 공개되고, 무술에서 체육적 성격으로 변화하여 살아남은 것이다. 이토스의 개혁 열정은, 형의 창작이나 개량에도 이르렀다. 학생들이 학습하기 쉽도록 헤이안 형을 새롭게 창작했으며 급소 공격이나 관절기 등 위험한 기술이 제거되었다.

이러한 움직임과는 별도로, 중국으로 건너간 오키나와인 중에는 현지에서 가라테 도장을 열거나 현지에서 중국 권법을 배우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고구스쿠이세이湖城以正, 히가온다칸료東恩納寛量, 우에치칸몬上地完文 등이 그렇다.

오키나와 당수가 일본의 공수도로 바뀌면서 오키나와는 당수도를 빼앗기게 된다. 

일본 본토로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일본 본토에 처음 가라테를 소개한 것은 메이지 시대에 도쿄의 쇼 후작 저택에 있던 류큐 귀족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다른 저택으로 초대되어 가라테를 연무하거나 양심류揚心流나 기도류起倒流 등 유술의 도장에서 표연하였다.

또 1908년, 오키나와 현립 중학교 학생들이 교토 무덕회 청년대회에서 무덕회의 요청으로 가라테의 본을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지도는, 후나코시 키친과 모토부 쵸키 등이 일본 본토에 건너간 이후이다. 1922년 5월 일본 문부성 주최 첫 체육 전람회에서 후나코시 키친은 가라테의 형과 시합 사진을 두 폭 족자로 만들어 전시했다. 이 전시를 계기로 이듬해 6월 후나코시 키친은 유도의 창시자 가노 지고로에게 초청받아 강도관에서 가노 지고로를 비롯한 200명이 넘는 유도 유단자 앞에서 가라테의 연무와 해설을 했다. 후나코시 키친은 도쿄에 머무르며 가라테를 지도하게 된다.

그 무렵, 오사카 칸사이 지역에서는 모토부쵸키가 가라테의 실력을 드러내 세상을 경탄시켰다. 그 해 11월 우연히 놀러간 교토에서 모토부는 복싱과 유도의 흥행 경기에 불쑥 끼어들어 러시아인 복서를 일격에 쓰러뜨린다. 당시 52세였다. 이 사건이 당시 국민 잡지 『킹』 등에서 거론되면서 모토부쵸키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때까지 일부 무술가나 호사가에게만 알려진 가라테의 이름이 일약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모토부는 오사카에서 가라테의 지도를 시작했다. 이들 2명의 활동으로 대학에서 가라테 연구회의 창설이 잇따랐다.

오키나와에서는 1924년 모토부쵸유本部朝勇를 회장으로 오키나와 당수 연구클럽이 설립된다. 1926년에는 오키나와 당수클럽으로 발전하면서 오키나와의 가라테 수련자들이 모이고, 가라테 기술 교류와 공동 연구 시도가 이뤄졌다. 참가자는 하나시로쵸모花城長茂, 모토부쵸유本部朝勇, 모토부쵸키本部朝基, 캰쵸토쿠喜屋武朝徳, 치바나쵸신知花朝信, 마부니켄와摩文仁賢和, 미야기쵸슌宮城長順, 교다쥬하츠許田重発, 오현귀呉賢貴(중국 복건성 출신의 차 상인으로 백학권의 달인이었다) 등 쟁쟁한 멤버였다.

일본 본토의 공수도 가라테와 오키나와의 당수를 구분해야 무술의 교류와 정체성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일본 가라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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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4월 17일 결성한 일본의 무술단체. 1942년부터는 일본정부의 외곽조직이 되었으며 1946년에는 연합국 지령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다. 1,300여명의 협회 관계자가 공직에서 쫓겨났다. 일본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단체이다.

1930년대에는 마부니켄와摩文仁賢和, 미야기쵸슌宮城長順, 도야마칸켄遠山寛賢 등도 일본 본토에서 당수를 가르쳤다. 1933년, 당수는 일본무덕회에서 일본 무도로 승인받았다. 이것은 오키나와 무술이 일본의 무술로 바뀌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가라테는 유도·유술 밑에 있는 한 부문으로 여겨졌다.

1929년, 후나코시 키친이 사범을 맡은 게이오대학 당수연구회가 반야심경의 공空의 개념에서 당수 카라테를 공수 가라테로 바꾸겠다고 발표한 것을 계기로, 일본 본토에서는 공수도 가라테 표기가 급속히 퍼졌다. 또 다른 무술과 마찬가지로 “도道”자를 붙여, 당수술에서 “공수도空手道로 바뀌었다. 오키나와에서도 1936년 10월 25일, 나하에서 열린 ‘가라테대가 좌담회’에서 당수를 공수로 개칭하기로 결정했다. 이 배경에는 당수唐手 가라테는 적국 중국을 상기시킨다는 군국주의의 영향이 있었다.

일본 본토의 가라테는 일본 무덕회에서 유도 밑으로 분류되어 차별화를 위해 취수取手(투이티)라는 유술 기법을 없애고 타격기로 특화했다. 같이 연습하던 봉술과 쌍절곤 등의 무기술도 없어졌다. 송도관 가라테에서 볼 수 있듯이, 형과 신법의 명칭도 새롭게 일본식으로 바꾸는 유파도 있었다. 오키나와로부터 2인 시합법이 충분히 전승되지 않아 일본 본토에서 새로운 시합법을 창작하여 부가하였거 이렇게 현대 가라테가 탄생했다. 오키나와 무술인 당수가 일본 무술인 공수로 바뀌게 된 것이다.

당수는 오키나와 무술, 가라테는 일본 무술

공수도 가라테는 일본 본토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전국대회도 조직되었으며 보호구를 입고하는 보호구 공수도도 나왔다. 하지만 일정한 룰을 정립하지 못해 경기에서조차 상대방을 타격하지 않는 슨도메(寸止)룰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50년 결성된 전일본 학생가라테 연맹주최로 1957년 슨도메룰에 의한 제1회 전일본 학생 가라테 선수권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같은 해 일본가라테협회 주최로 전국가라테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1962년에는 야마다 타츠오山田辰雄가 고라쿠엔 홀에서 제1회가라테경기회에서 글러브 가라테 대회를 개최했다. 1969년 전일본가라테연맹 주최로 제1회 전일본가라테선수권 대회가 일본 무도관에서 개최됐다.

같은 해, 정통가라테에 의문을 품고 독자적인 직접 타격제 가라테 경기를 모색하던 극진 가라테 창시자의 최영의는 제1회 오픈토너먼트 전일본 가라테선수권 대회를 도쿄체육관에서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보호구를 입지 않고 직접 타격을 허용하였다. (손으로 얼굴 타격은 제외)

오키나와의 당수는 일본의 가라테로 변화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현재 오키나와의 가라테와 일본의 가라테는 같은 무술인가? 일본의 가라테는 오키나와 당수를 수입하여 만든 무술이지만 꽤 많은 차이가 나며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 간에 가라테 교류를 많지 않은 실정이다. 

일본의 가라테와 오키나와의 당수를 구별해야 각 무술의 정체성과 무술 교류의 실상을 더 정확히 볼 수 있다. 


일본 위키피디아 가라데 항목을 참조하여 글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