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는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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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는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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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왕국 시절의 수리궁전

한국인이 가장 많이 가는 일본의 관광지인 오키나와(일본어: 沖縄島)는 한반도에서 남쪽으로 1천 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난세이 제도 최대의 섬이다. 규슈와 대만의 중간 즈음에 있으며, 동중국해와 태평양에 둘러싸인 해역에 펼쳐진 오키나와 제도, 미야코 제도, 야에야마 제도 등의 섬들로 구성된다. 기후는 한겨울에도 오사카나 도쿄의 봄 날씨를 보여주는 온난한 아열대성 지역이다. 벵골보리수와 아코 등 열대 및 아열대성의 식물이 자생하며, 일 년 내내 꽃이 활짝 피고, 투명하고 파란 바닷속에는 아열대 어종들이 가득한 다이빙 리조트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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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미나지마 해변

오키나와는 백사장이 몹시 하얗고 바다가 파랗고 아름다워서 동남아 물속보다도 좋다는 평가들이 많다. 특히 오키나와 군도의 일부인 이시가키섬과 이리오모테섬은 원시림이 아름답고 희귀 동식물이 많은 자연의 보고로 유명하다. 이시가키섬은 일본 토종 소인 ‘화우(和牛)’의 고향이기도 하며, 영화화까지 되어 유명해진 소설 ‘남쪽으로 튀어’의 무대이기도 했다. 이리오모테섬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유명 애니메이션인 ‘원령 공주’의 배경 컨셉을 얻어온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오키나와는 15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400여 년의 기간 동안 ‘류큐 왕국’으로 번성하였다. 류큐 왕국 시절에는 중국, 일본, 조선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며, 필리핀 및 태국과도 교역하였다. 당시에 류큐 왕국은 유럽인에게도 ‘레키오스’ 또는 ‘고레스人’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때가 오키나와의 전성기 시절이었으며, 그 이후 오키나와의 역사는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다.

1591년 현재의 가고시마인 사츠마의 침공이 시작되었으며, 결국 1606년 일본에 복속되어 버린다. 사츠마는 임진왜란 때 조선반도를 침략했던 주력부대의 출신지로 유명하다.

1875년 메이지 정부가 류큐 왕국의 폐지를 명령했고, 1879년 「오키나와현」이 설치되어 완전한 병합이 이루어졌다. 조선왕조가 겪었던 일을 오키나와는 조금 먼저 겪은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때 일본제국의 최후 항전지가 되어 오키나와는 완전히 피폐해졌고, 주민들은 대량 학살되었다. 마지막 전투 시기에 학살된 오키나와 주민은 12여만 명에 이르며, 당시 오키나와 주민의 1/3에 해당하는 숫자였다고 한다.

일본이 만든 세계 최대의 전함 야마토는 그 당시 오키나와 전투에서 침몰했다. 야마토는 오키나와의 보우노사키 해협에 지금도 가라앉아 있는데,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야마토를 우주 전함으로 개조하는 작업은 아직도 시작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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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전함 브이호라는 만화를 본 중장년층이나 이해할 이야기이다. [사진 : 야마토 전함의 침몰장면]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국이 이 섬을 점령했고,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후 오키나와는 미국이 차지했으며 1972년까지 미국의 식민지로 있었다. 1972년에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한 이후에도 미군의 군사기지가 여러 개 남아 있으며, 지금까지 여러 가지 사회문제의 근원이 되고 있다. 오키나와에는 후텐마, 가데나 등등의 유명한 공군기지와 해병대 기지가 있으며, 이 근처의 지역경제는 미군 기지의 부속 산업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도의 빨간 부분은 현재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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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는 미군 기지가 아주 많다.

오키나와는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동시에 받아온 곳 이어서, 양쪽의 문화가 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중국의 영향으로, 대륙에서 유행하는 사자춤이 오키나와에도 있으며, 주요 건축물에는 사자가 있고, 집집이 수호신처럼 세워놓는 작은 사자상이 있다. 오키나와의 서민 건축은 한반도 남부 건축과 흡사해서, 여행을 하다보면 묘한 기시감을 느낄 정도이다.

음식도 중국과 일본의 혼합을 보여준다. 오키나와 국수는 중국의 홍소우육면에 돼지고기를 토핑으로 추가한 듯한 구조와 맛을 보여주는데, 본래 밀가루면을 이용한 중국식이었으나 현대에 들어서 일본정부의 지시로 이름이 ‘오키나와 소바’로 바뀌었다. 이름은 소바지만, 메밀이 아닌 밀가루면을 사용하며, 일본 본토의 우동면과도 다르다. 그밖에 일본의 영향으로 다수의 일본요리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몽골제국이 고려를 침공했던 시기에 제주도까지 철수했던 삼별초 부대가 오키나와로 흘러갔고, 섬에 정착하여 현지화되었다는 전설은 있으나, 아직 명확한 사료와 유물 증거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의 유전자 분석 결과, 1/3은 조선인, 1/3은 일본인, 1/3은 남중국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과거에 어떤 경로로든 조선과 교류가 활발했음은 사실인 듯하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지금도 일본 본토 사람들을 ‘대화인(大和人)’ 혹은 ‘본토인(本土人)’으로 부르며 적대적으로 배척하고 있다. 오키나와의 한 거리에는 ‘일본인 출입금지’라고 쓰인 팻말이 있는 술집도 등장했다. 최근에 있었던 전 주민 여론조사에서는 전체의 75%가 일본으로부터의 조건 없는 독립을 지지했고, 나머지 20%도 점진적 독립을 지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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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테를 연습하는 오키나와인들. 가라테의 출발은 사츠마번 식민지 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키나와 가라테는 이런 슬픈 역사를 가진 오키나와 인들이 일본 본토인들과 싸우면서 연구되고 단련한 무술이다.

오키나와의 소유권은 사츠마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미국으로, 최종적으로 1972년에 미국령에서 다시 일본령으로 넘어갔다. 오키나와는 현재 일본령이며 독립의 가능성도 없지만 근대에 들어 식민지 지배와 약소국의 설움을 겪었다는 점은 한국과 유사하다. 가라테의 출발 자체가 사츠마의 식민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

사츠마번은 오키나와를 점령한 후 강제적으로 설탕 농사를 짓게 했으며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키나와의 특산물이 흑당이 되었다. 사츠마번은 점령 후 독립운동을 우려해 모든 쇠붙이로 된 무기들을 압수하였으며 이것을 ‘칼 사냥’이라고 부른다. 무기가 없자 맨 손으로 사츠마번에게 대항하기 위해 가라테가 나오게 되었다.

이런 오키나와의 곡절많은 역사를 보면, 오키나와 무술을 검도나 유도, 아이키도 등의 일본 본토무술과 동일시하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다. 20세기에 들어 가라테가 일본 본토로 들어간 것은 정상적인 문화교류의 일부분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오키나와 현지에서 활동하는 가라테 9단 원로들로부터 무술 지도를 받아보면, 처음부터 일본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며 진행하는 경우가 흔하다. 가라테의 정신은 본래 항일(抗日) 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