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는 류큐국(1609년-1879년)으로 독립왕국을 이루었지만 1609년 일본 사츠마번의 침략을 받았으며 1879년 일본식민지배를 받고 오키나와현이 되었고 1945년 종전이후에는 미군정의 통치를 받다가 1972년 다시 소유권이 일본으로 넘어가 지금인 일본령인 상태이다.
오키나와는 중국의 복건성과 거리가 800km, 일본 가고시마와는 700km이며 부산과는 1000km가 떨어져 있어 한중일 삼국의 가운데 있으며, 전통적으로는 일본보다는 중국과 교류가 많았던 국가이다.
우리나라와는 1389년 고려 창왕 시절부터 양 국간의 통교가 시작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308회나 류큐와 관계 기록이 나와있다. 조선도 류큐에 사신을 파견하였고(3회), 류큐도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37회)
조선와 관계가 빈번했던 이유는 명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 있었으며 류큐는 해양국가로서 교역을 중요시 하였기 때문이다. 류큐는 조선에 상아, 소뿔, 후추, 닭 등 동남아시아 물품을 보냈으며 조선은 목면, 섬유, 호피, 화문석, 인삼, 종이 등을 보냈다.
류큐가 일본 사츠마번의 침략을 받은 이후로는 큐슈와 쓰시마 섬의 상인을 매개로 하는 중개무역으로 바뀌었다. 1704년에는 제주도에 늘어난 류큐민을 위해 류큐어 통역관 양성소까지 생기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사츠마번의 류큐 침공 이후인 1609년부터 1840년까지 230여년 동안 78회의 교류가 있었다. 이처럼 양국간의 관계가 긴밀해사 오키나와 나하항 근처에는 조선인들이 사는 마을이, 도마리항 근처에는 조선인 공동묘지가, 19세기 말까지 조선 사신을 위한 영빈관인 조선관이 있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수백 년동안 오키나와와 한국과는 교류가 아주 밀접하였다. 오키나와 나하시의 줄다리기 축제는 한국의 기지시 줄다리기와 거의 유사하다.
오키나와의 민속놀이인 줄다리기와 한국 기지시의 줄다리기는 거의 차이를 모를만큼 형태가 유사하다.
반대로 오키나와 씨름인 시마(沖縄角力)는 한국의 씨름과 똑같다.
일본에서는 일본의 스모와 다른 오키나와 씨름의 기원을 모른다고 하는데 정답은 간단하다. 한국에서 넘어간 것이다.
가라테는 비슷한 시기에 일본과 한국에 전파되었고 가라테의 기원은 오키나와의 무술이며 가라테의 전파는 고대부터 쭉 이어진 정상적인 문화교류의 한 부분이다.
줄다리기의 기원은 인도신화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남방루트를 거쳐서 한국으로 전해전 것이 맞을 것이고 씨름은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한 레슬링의 일종이기때문에 북방루트를 따라 오키나와로 전해진 것이 맞을 것이다.
양 국의 교류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라테는 중국의 남쪽무술인 남권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오키니와의 남방루트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과 태권도의 일부가 된 것이다. 오키나와의 가라테가 일본으로 전해진 시기와 한국인들에게 전해진 시기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으며 이것은 고대부터 계속 이어진 정상적인 문화교류의 일부분이다. 오키나와의 당수는 일본에 전해져 공수도 가라테가 되었고 한국에 전해져 태권도의 한 부분이 되었으며 한국의 씨름은 오키나와에 전해져 오키나와 씨름인 시마가 되었다. (시마와 씨름의 발음은 어딘지 유사해서 별도의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http://15.165.179.230/?p=1009